백성이 사랑한 왕 세종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세종 이도 (1397~1450)
세종만큼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왕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만큼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세종의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파헤쳐 보겠습니다.
세종의 어린 시절
평범하지 않은 시대, 평범하지 않은 집안에서 나다
이도는 1397년 서울 북부 준수방(서울시 종로구 통인동)에 있는 왕의 사저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뒤었고, 아버지 이방원이 왕이에 오르기 3년 전이었죠.
세종의 삶을 이해하려면, 꼭 알아야 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세종의 할아버지인 이성계와,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 입니다.
이도의 할아버지인 이성계와 아버지 이방원은 고려 사람이었습니다.
고려 후기, 불교와 권문세족의 부패를 비판하는 신흥 사대부들을 기억하시나요? 그러나 그 안에서도 이상이 같을 수 없었습니다.
고려 후기 지식인들은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에 주목했는데요. 성리학으로 고려를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성리학을 기반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이도의 할아버지인 이성계는 후자 쪽에 섰습니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도록 고려의 실력자인 정몽주를 제거 하는 등 궃은일을 도맡았습니다. 이 집안은 무인집안이었습니다. 이방원은 뛰어난 무인이면서도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여 학자로서의 풍모를 함께 겸비한 인물이었죠. 어머니 민씨 부인은 여흥 부원군 민제의 달로, 이방원의 정치적 반려자면서 매사 당당하고 포부가 큰 여장부였습니다. 부부는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습니다. (이제(양녕대군), 이보(효령대군). 이도(충녕대군), 이종(성녕대군)과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조선이 건국되자 정국 주도권은 정도전이 가져갔지요. 이성계는 여덜 째 왕자인 어린 아들 방석을 세자로 앉혔습니다.
이방원은 이복동생 방석이 세자가 되자,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방석, 방번 형제를 모두 죽여 버립니다. 이방원은 자신처럼 사병을 거느린,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들의 여럿 있었는데요. 그들의 세력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400년,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을 치룬 이후 1400년 2월 왕세제로 책봉되고, 그 해 11월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의 3대왕으로 즉위합니다.
이도가 4살이 되던 해에,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며 이도는 가족들과 함께 궁궐로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스트레스 속에 성장
이도네 엄마 아빠 부부싸움 이야기
태종 4년(1404년) 첫째인 양녕대군이 세자가 되었습니다. 태종은 첫째인 양녕을 왕세자로 책봉한 후 , 건강상의 이유로 당시 13세 였던 왕세자에게 선위를 표합니다. 태종의 나이가 불과 39세 때였습니다. 선위는 군주가 살아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군주의 지위를 물려 주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같은 왕조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는 것을 말하지요. 역사 학계에서는 태종이 선위한 것이 그의 본심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태종이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는데 이 선위를 이용한 것이지요.
당시 태종의 외삼촌 격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태종이 양녕에게 선위하기를 원하였고, 신하들의 선위 반대 움직임에도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양녕은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4년 전 이방원이 치열한 권력 쟁탈전으로 가정을 돌보지 못하던 시기에 외갓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 외삼촌들과 어울려 놀며 성장했지요. 민씨 형제는 다른 조카들보다도 더 외가와 친했고, 외가와 가까웠습니다. 그 점이 외삼촌들이 양녕을 빨리 왕으로 만들고 싶은 이유였겠지요?
태종은 이 선위파동으로 민씨 가문 처남 4명의 목숨을 모두 빼앗습니다. 이후 태종 이방원과 민씨 부인의 갈등은 심해지고 민씨는폐비 위기까지 놓입니다.
성격이 고약했던
충녕대군 이도
세종은 충녕 대군 시절 성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태종실록>은 "이되(세종)은 성질이 고약해 형제들 사이에서 무시당했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놓고 역사 학자들은 충녕 대군이 성장 당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틈만 나면 짜증을 부리고, 성을 냈을 거라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으시나요? 위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스트레스를 안 받고 예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적장자 상속의 세계
조선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원칙이 있는데, 적장자 상속이라는 것입니다. 적장자 상속이 이루어진 경우는 조선시대 단 7명.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조 정도 였습니다. 그러나 완벽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해서 성군이 되는 걸까요?
따져보면 연산군이야 말로 왕세자 교육을 받고, 적장자로서 틀림 없는 사람이었죠.세종대왕으로 칭해지는 이도는 3남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완벽한 자격을 갖춘 양녕 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났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임진왜란 이전까지 정사와 야사에서는 야양녕 대군이 학문에 뜻이 없고, 여색을 밝히며 세자로서의 품위를 잃어 폐위 당하였다는 설이 유력했는데요. 임진 왜란 이후에는 그 평이 달라졌습니다. 양녕 대군이 태종의 뜻이 셋째 충녕에게 가 있음을 확인하고, 일부러 미친 척을 하여 세자 자리에서 물러난 비운의 주인공이라는 설이었지요.
지금도 양녕대군의 폐위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태종이 원한 군주상에 양녕 대군 보다는 충녕 대군이 더 적합했다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자신을 드러낸
충녕대군 이도
1418년 태종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는 절차를 취하여 양녕 대군을 세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면서 충녕 대군을 세자로 선택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충녕이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몹시 춥거나 몹시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는다. 또 정치에 대한 대체를 알아서 언제나 나라에 큰일이 생겼을 때 의견을 내는데 소견이 범상치 않고 뛰어 났다. 또 그 아들 중에 장차 크게 될 자격을 지닌 자가 있으니, 내 이제 충녕을 세자로 삼고자 하노라." <태종실록>
세종은 양녕 대군이 세자이던 시절에도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 하지 않았던 영민한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이 삼남이라고 해서 왕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1418년 6월 충녕 대군은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그 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22살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세종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만원 짜리에 주인공 세종이 왕이 되기까지, 그의 성장과정을 알아보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세종의 업적과 만원 짜리의 상징들은 차후 글로 만나요~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 만원 지폐 속 숨겨진 역사 이야기 /세종대왕,훈민정음,혼천의 (3) | 2024.12.13 |
---|---|
[여행] 북한산 우이령 길: 북한산 둘레길 예약 하고 걸어서 왕복 2시간, 쉬엄쉬엄 단풍 구경하세요🍁🍂 (9) | 2024.11.15 |
[역사][경제] 화폐/돈/ 우리나라 지폐의 숨겨진 비밀(1) (1) | 2024.11.13 |
[역사] 조선(중기) 화폐 속 인물 / 신사임당 (3) 5만원 권 화폐 이야기 (0) | 2024.11.09 |
[역사] 조선(중기) 화폐 속 인물 / 신사임당 (2) 그녀의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5) | 2024.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