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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 조선(초기) /천원/화폐속 인물/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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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화폐에 문화유산이 최초로 등장 한 때는 1910년 12월 이라 합니다.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1원짜리 지폐에 수원화성의 화홍문을 그려 넣은 것이 시초라 하죠. 

이후 여러 역사적 인물을 비롯해 한 나라의 문화 유산과 위인들이 화폐에 등장했다고 합니다. 

 

천원의 주인공 이황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황은 불교와 양리학을 배척하는 강경하고 꼬장꼬장한 성리학자로 여겨지나, 꼰대 선비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 뿐 아니라 후대 선비와 동아시아 전역에서 존경 받는 이유는, 그가 주자학을 집대성한 업적을 이루었기 뿐만 아니라, 사람을 우선시하는 겸손한 말과 행동으로 존경을 받는 참 선비였기 때문이었죠. 

 

 

이황의 표준 초상과 성학십도 입니다. 

 


이황(1501-1570)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그의 생애는 여러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 단계에서의 주요 사건과 그의 성격, 취미, 외모 등을 살펴보겠습니다.

유년기 (1501년 - 1518년)

  • 출생: 150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남.
  • 교육: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이 컸으며, 12세에 아버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움.
  • 성격: 호기심이 많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강했음.
  • 취미: 독서와 학문 연구.

청년기 (1518년 - 1534년)

  • 학문적 성장: 18세에 《야당》이라는 시를 지어 학문적 재능을 드러냄.
  • 관직 생활: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 성격: 결단력 있고 지혜로우며, 학문에 대한 열정이 깊었음.
  • 취미: 학문 연구와 시 쓰기.

중년기 (1534년 - 1560년)

  • 관직 생활: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특히 성균관 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
  • 성리학 연구: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며, 많은 저서를 남김.
  • 성격: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지님.
  • 취미: 학문 연구와 시 쓰기.

노년기 (1560년 - 1570년)

  • 퇴계 생활: 1545년 을사사화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에 전념.
  • 사망: 1570년 12월 8일, 69세의 나이로 사망.
  • 성격: 끝까지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음.
  • 취미: 학문 연구와 시 쓰기.

외모

  • 초상화: 이황의 초상화는 온화하고 지혜로운 인상을 주며, 그의 인자한 성격을 잘 나타냄.

사생활

  • 가족: 두 번의 결혼을 했으며, 첫 번째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었고, 두 번째 부인 권씨와도 자녀를 두었음.
  • 생활: 관직 생활 중에도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학문에 전념함.

일화 및 에피소드

  1. 학문에 대한 열정: 이황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이 컸습니다. 그는 책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를 통해 다양한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2. 형제와의 갈등: 이황은 형제들과의 갈등을 겪었으나, 이를 통해 더욱 학문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3. 어린 시절의 일화: 이황은 어린 시절부터 성실하고 지혜로운 성격을 지녔습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습득했으며, 이를 통해 조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

이황의 업적은 조선 시대의 경제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성리학 연구는 조선의 정치, 교육,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학문적 업적은 오늘날의 교육 제도와 학문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황의 생애와 업적이 현대에 미친 경제적, 문화적 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경제적 효과: 이황의 성리학 연구는 조선 시대의 경제 정책과 사회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오늘날의 경제 정책과 사회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 문화적 효과: 이황의 성리학 연구는 조선 시대의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이는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오늘날의 문화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황의 생애와 업적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학문적 열정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조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 교육자, 화가, 그리고 성리학자였습니다. 

16세기는 조선 사림파의 성장기로, 이 시기에 선비들은 자신을 단련하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퇴계 이황은 이러한 수기치인의 정신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수기치인은 스스로를 수양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는 군자의 두 가지 기본 과업입니다.

 

또 퇴계 이황은 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천원권 앞면에는 퇴계 이황, 명륜당, 매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천원권에 그려진 퇴계 이황의 뒤에 있는 한옥은 '명륜당'으로, 생원이나 진사 시험에 합격한 유생들이 공부하던 성균관 내의 건물입니다. 

 

퇴계 이황은 유학과 문묘의 관리를 담당하는 전임관으로서 대사성에 여러 차례 역임했습니다.

그가 오래 머물렀던 명륜당은 현재 보물 141호로 지정되어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에 위치해 있습니다.

 

 천원권의 명륜당 위에 그려진 꽃은 매화로, 사군자 중 하나이며 선비정신을 상징합니다.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말하며, 퇴계 이황은 추운 봄날에도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를 특히 사랑했다고 전해집니다.

 

매화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퇴계 이황이 매화를 노래 하는 시만 해도 1백 수가 넘습니다.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한마디가 "매화에 물을 주어라" 라고 하기도 하죠. 

 

여기 이런 설화가 있습니다.  퇴계 이황과 러브스토리를 남긴 '두향' 이라는 관기가 있다고 하죠.

둘은 매화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친해 졌다고 하지요. 여담이지만, 재미로 이황과 두향의 러브스토리를 재미로 전해 볼까요?

 

그들의 첫 만남은 퇴계 이황 나이 48세. 단양 군수로 부임하던 때였죠. 두향의 나이는 18세였습니다.

의외로 두향이 먼저 반듯해 보이는 이황에게 반했다 합니다. 그러나,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이황 때문에 두향이 마음을 졸였다고 하죠. 

퇴계 선생은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고 인생 최대 암흑기였던 상태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두향은 이런 시를 지었다고 하죠. "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때 / 어느 듯 술 다 하고 임 마져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 날을 어이 할까 하노라 " 둘의 사랑은 공무원이 그러하듯, 이황이 9개월만에 풍기 군수로 부임지를 옮기며 끝이 나는데요.

 

두향이 그에게 매화 분재 화분을 선물했다고 해요.

 

둘은 그 후로 아니 만났다 하는데. 그 분재 화분은 소중히 아꼈다고 하네요. 심지어 선생은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 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까지 했다는군요. 

 

와... 이런것이 당대의 사랑일까요?

 

글쎄요, 후대 사람들의 상상력일까요? "매화에 물을 주어라" 라고 남긴 그 한마디. 퇴계 선생이 죽고 화분에 있던 매화를 마당에 심었고, 그 나무가 현재 안동 도산 서원 입구에 피어 천원짜리 화폐에도 등장한다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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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 짜리 뒷면에는 퇴계 이황이 머물렀던 도산 서당을 그린 '계상정거도'가 있습니다.

'계상 정거도'는 퇴계 이황이 서거하신 지 177년 이 지난 1746년, 겸재 정선이 퇴계 이황이 머물던 도산 서원과 그 주변 풍경을 그린 그림입니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을 그렸죠. 저 작은 암자 속 퇴계 이황 선생님이 계실 것 같지 않나요? 

 '계상정거'는 모든 권좌에서 물러나 시냇물 흐르는 곳에 자리 잡고 고요히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황의 호인 '퇴계'와 의미가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다면, 리움 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으니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음미 해 보세요


이 그림은 위작 논란이 있었으나 문화재위원회의 감정을 거쳐 진품으로 결론이 났으며, 경매에서 34억 원이라는 높은 가격에 낙찰된 국가지정 보물입니다. 천원권 지폐를 통해 우리는 매일 위대한 이황 선생님과 그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천원 지폐에 담긴 퇴계 이황의 이야기를 알아보는 것은 어떠셨나요? 앞으로 천원 지폐를 사용하실 때, 퇴계 이황 선생님과 관련된 역사를 한번쯤 되새겨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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