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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정비한 까닭/집현전/농사직설/향약집성방/칠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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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우의정과 이조·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

                                                                                                                                            『세종실록』

 

 

위의 세종의 말에서 유독 눈에 들어 오는 단어는 '의논하자' 입니다. 22살의 나이에 당대 최고의 학자인 변계량으로 부터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고, 부왕 태종으로부터 정치의 본질을 안다는 평가를 받은 세종의 즉위 후 첫 마디는 겸손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세종은 항상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의 동참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정치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았던 것입니다. 

세종은 좋은 정치를 펼리쳐면 무엇보다 뛰어난 인재를 기르고 학문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즉위 1년 6개월 만에 학문과 정책 연구를 담당하는 집현전을 설치했습니다.

 

집현전을 설립한 것이 세종인가요?

 

'현명한 사람들을 모으다'란 뜻인 집현, 

집현전(集賢殿)은 조선 태종 때인 1400년에 설립되었습니다. 그 설립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왕권 강화: 조선 초기,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유학을 통해 정치와 사회를 통치하고자 했습니다. 집현전은 조정 내에서 유학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정책을 연구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설정되었습니다.
  2. 학문과 문화 발전: 조선은 유교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었고, 집현전은 유학 관련 연구와 교육을 통해 국가의 학문적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의 학문과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3. 경전과 역사 편찬: 집현전은 역사서와 경전의 편찬을 담당하여,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는 조선 백성들의 정체성과 국가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4. 정치적 자문기관: 집현전은 국왕에게 정책 및 외교에 대한 자문을 제공하는 기구로, 국정 운영의 중요한 조언자로 기능했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세종 21년, 1435년) 시기에 집현전의 기능과 위상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세종은 집현전의 학자들과 함께 여러 중요한 정책을 구상하고, 한글 창제와 같은 중요한 업적을 이루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유교 학문을 발전시키고, 학자들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집현전의 설립은 태종의 업적이지만, 세종이 그 기관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갔는지가 더욱 부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종은 집현전을 완전한 국가 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의 중심 기구로 삼았고, '재행연소자(才行年少者)' 라 하여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최고의 젊은 인재들을 모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공채일까요? 

이때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인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 등이 속속 집현전에 모여들었습니다. 

집현전 학사들

 

집현전의 역할과 하는 일 

 

집현전은 조선 시대의 중요한 학문 연구 기관으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1. 학문과 연구의 중심지: 집현전은 세종대왕에 의해 설립되어, 조선 왕조의 학문과 연구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학자들이 모여 극진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며 조선의 학문적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2. 한글 창제: 집현전은 한글, 즉 훈민정음의 개발과 보급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협력하여 한글을 창제하고, 이를 통해 민중의 읽기와 쓰기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는 조선 사회의 문화적, 교육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3. 정치와 정책 연구: 집현전의 학자들은 국가 정책을 연구하고 주요 문서를 작성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정치적 안정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4.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집현전에서 이뤄진 연구와 저술은 현재까지도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조선 시대의 학문적 성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세종은 당대 최고의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집현전 학자들에게 독서와 학문 연구를 바탕으로 한 국가 정책 수립 및 각종 편찬 사업 임무를 맡겼습니다. 이 집현전에서 학자들은 과거에 시행된 여러 제도를 분석하고, 정치 현안이 되는 정책 과제들을 연구했습니다. 또한 중국의 서적들도 참조하면서 당시의 현실에 맞는 사례들을 수집하고 정리했습니다. 이외에도 왕을 교육하는 경연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 과거 시험의 시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임무도 맡았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주택에 관한 옛 제도 조사,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조선의 약초 조사등을 하면서 의학, 역사, 의례, 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책들을 편찬했습니다. 또한 시계, 천체 관측기구 등 다양한 과학 기구를 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물은 세종의 애민 정신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위해 사가독서라는 특별한 제도를 만들기도 합니다.

세종은 아무리 훌륭한 신하나 학자라도 조정의 업무 때문에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현실을 정확하게 알았던 것입니다.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은 신하는 집에서, 때로는 산사를 오가며 짧게는 한달 길게는 몇 년씩 자유롭게 책을 읽고 연구에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세종은 당대 최고의 인재들로 구성된 집현전 학자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정치-법률-역사-유교-문학-어학-천문-지리-의약-농업 기술 등 전분야에 걸쳐 종합 정리하는 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집현전은 어딧어요?

 

집현전 추정 위치
수정전 서쪽 부근 사진

 

1915 일제의 조선물산 공진회 개최로 완전히 철거되어 현재 공터로 남아 있다 궐내각사 영역으로

왕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기구인 집현전, 승정원, 홍문관,예문관,교서관이 있었고,

왕족의 생활과 활동을 보좌하던 내반원,상서원,상의원,사옹원,사복시등이 있었던 곳이다

집현전은 조선시대에 경희궁 내에 위치해 있었으나, 현재는 경희궁에서의 원래 위치를 기준으로 한 정확한 유적지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 집현전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사진은 없지만,  집현전은 경희궁 내에서 수정전(須弥殿) 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경희궁 수정전

 

 

참고로, 수정전(須弥殿)은 조선시대의 주요 궁궐 건물 중 하나로, 주로 다음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1. 정무 보고: 수정전은 국왕이 정무를 보고하고, 국가 정책을 의논하는 장소였습니다. 왕과 고위 관리들이 모여 정부의 중요한 사안을 다루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2. 외교 접견: 수정전은 외국 사신이나 귀빈을 접견하는 중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왕이 외교적 문제를 논의할 때 이곳에서 사신들을 맞이했습니다.
  3. 국가 행사: 수정전은 국가적 의식이나 행사, 즉 성전환식(왕의 즉위식)과 같은 중요한 상황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소로 기능하며, 격식을 갖춘 의식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4. 정책 결정: 왕과 신하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는 장소로도 기능했습니다. 이곳에서 정책의 방향이 설정되곤 했습니다.

 

 

 

집현전학자들이 만든 업적은?

 

훈민정음

집현전에서 작성된 유명한 저작물 중 하나는 훈민정음입니다. 이 책은 세종대왕이 한글의 창제를 알리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한글의 기본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농사직설

 

또 다른 저작물로는 『농사직설』이 있습니다.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책들 중에 으뜸으로 꼽히는데요. 제목에서도 알 수 있 듯 '노농(老農)' 즉 오랜 농사 경험이 있는 농민들이 직접 농사를 지은 체험담을 바탕으로 편찬된 책입니다. 내용을 들으니 더 멋지지 않나요? 이 책은 농업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정리한 것으로,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지침서입니다.

 

당시 조선에서 활용된 농서는 13세기 중국 원나라 때 편찬된 『농사집요』였는데요. 이는 중국 화북 지방의 농법을 소개한 책이라 그 농법을 조선에 적용하기에 무리가 따랐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429년 32살의 청년 국왕 세종은 우리나라 풍토와 토질에 맞는 농업 기술을 보급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껴 왕명을 내려 편찬한 것이 바로 농사직설 이었지요.

세종은 각 고을에 부임하는 지방관들에게 반드시 이 책을 가져가 활용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경복궁 후원에 논 1결을 만든 후 직접 농부가 되어 농사를 짓고 그 농법의 효과를 확인 했다고 합니다. 

세종의 열정으로 조선의 농지는 고려 말에 비해 2.4배, 수확량은 4배나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향약집성방

세종은 의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중국 의서와 약재로 의술이 행해졌습니다. 세종은 우리나라의 풍토에 적합한 국산 약재가 중국 약재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대규모 편찬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병 치료에 쓰이는 수많은 한약 처방 가운데 주로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초로 구성된 처방들을 모아 『향악집성방』을 편찬했습니다. 

세종은 백성을 위해 독창적인 우리 특유의 향약을 개발하고, 산간 오지의 처방들까지 정리한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국내 약초를 채집해서 향약집성방 을 따르기만 하면 약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칠정산

세종은 백성들에게 정확한 때와 시를 알려주고자 역법을 연구하여 칠정산을 편찬했습니다. 칠정산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한성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계산한 역법서로, 해,달, 행성의 운행 원리와 위치, 시각 등이 정확하게 계산되어 있습니다.이를 통해 조선은 일식과 월식 등 천체 운동을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종은 집현전이라는 국가 최고 인재들이 모인 정책 연구소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함께하는 정치'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세종의 집현전 학자에 대한 애정응ㄹ 볼 수 있는 일화들이 많습니다. 

세종은 어느 겨울 밤 집현전에서 공부하다 깜빡 잠이 든 신숙주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담비 가죽 옷을 덮어주었고, 집현전 학자들에게 조선 최고의 특산물 중 하나인 귤을 하사하여 사기를 높여주었다고 합니다. 

 

 

향약집성방

약재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대규모 편찬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병 치료에 쓰이는 수많은 한약 처방 가운데 주로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초로 구성된 처방들을 모아 『향악집성방』을 편찬했습니다. 

세종은 백성을 위해 독창적인 우리 특유의 향약을 개발하고, 산간 오지의 처방들까지 정리한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국내 약초를 채집해서 향약집성방 을 따르기만 하면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위해 사가독서라는 특별한 제도를 만들기도 합니다.

세종은 아무리 훌륭한 신하나 학자라도 조정의 업무 때문에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현실을 정확하게 알았던 것입니다.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은 신하는 집에서, 때로는 산사를 오가며 짧게는 한달 길게는 몇 년씩 자유롭게 책을 읽고 연구에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세종은 당대 최고의 인재들로 구성된 집현전 학자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정치-법률-역사-유교-문학-어학-천문-지리-의약-농업 기술 등 전분야에 걸쳐 종합 정리하는 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집현전에서 활동한 학자들이 작성한 여러 역사서와 문집이 있으며, 이들 역시 조선시대의 학문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더 궁금한 것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좋은 콘텐츠로 후속 글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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